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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데스크

<금강 기획③>충청 역사의 젖줄 금강/리포트

◀앵커▶ 

금강의 천릿길을 둘러보는 기획 보도,

마지막 순서입니다.



바다와 가까운 논산 강경포구는

근대 시대에 접어들어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부여를 휘감고 있는 백마강은

백제는 물론, 충청의 역사가 서려 있는

곳인데요.



금강 하류에 숨겨진 충청의 이야기를

이승섭 기자가 소개합니다.

◀리포트▶ 


논산시 강경읍에는 17세기 후반부터

금강이 굽이쳐 흐르는 강경포구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됐습니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하루 2백여 척의

어선이 오가는 수상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했습니다.



[한병수 강경역사문화연구원 기획실장] 
"서해안에서 잡은 모든 물고기가 (전북) 군산을 통해서 강경으로 들어와서 강경에서 모든 생선이 분배가 되는 거죠. 강경을 통해서 대전에서도, 심지어 전주까지."



전국 3대 시장이자 2대 포구로 이름난

강경포구에 노동자들이 몰려들면서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조합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승섭 기자]
"노동조합에서는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찾는 것은 물론, 수학 과목과 같은 기본적인

교육까지도 이뤄졌습니다."



풍부한 해산물을 활용한 염장 기술로

강경의 젓갈 산업은 꾸준히 발달해 지금은

논산의 명물로 명성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한병수 강경역사문화연구원 기획실장] 
"육상 교통이 발상하지 않았을 때는 해상교통에서 모든 걸 다 운반했어요. 분배 역할을 하는 금강을 중심으로 한 상업의 중심지가 바로 금강 때문에 이뤄지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합니다."



백제 시대, 정치를 논하고 고위 관직자를 뽑던

천정대를 지나면서 금강은 백마강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합니다.



백제의 큰 강이라는 의미의 백마강.



백제 수도인 사비성 16km 둘레를 휘감아 돌며

백제의 흥망성쇠를 함께 했습니다.



백마강은 넓은 강폭과 빠른 유속으로

당나라의 침략을 저지했고, 삼천 궁녀가

낙화암에서 백마강으로 몸을 던진 일화는

절개의 상징으로 전해집니다.



[이승섭 기자]
"백마강은 조선 시대에도 중요한 교통로였습니다. 백마강 곳곳의 나루터에는 조선 시대 유명한 문인들이 오갔고, 자연스레 유학도 발달했습니다."



백마강 나루터 10여 곳마다 크고 작은 서원이

세워졌고, 낙화암에서 전해진 절개에 감탄한

우암 송시열 선생은 자신의 흔적을 새기기도

했습니다.



[이순선 부여군 문화관광해설사] 
"백제의 문화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까지도 경관이 굉장히 좋은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누정문화(누각과 정자 문화)가 많이 발달되어 있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충청을 관통해 천릿길을 흐르는 금강.



금강은 지금도 충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아 흐르고 있습니다.



MBC 뉴스 이승섭입니다.
이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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