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축하
(만남) 할아버지
40년 전 7월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날
세상에 태어나 축복을 받지 못 하고 가족의 애간장을 녹였던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10달을 채우지 못해 사람 이라기 보다는 외계인 ET 같았고 숨쉬는 것 조차
힘에 겨워 엄마 젖조차 빨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가 바로 저입니다.
손자를 그리도 바라던 할아버지께서는 손꼽아 꿈에서 조차 손자를 기대했건만
위로 손녀딸이 둘이나 있건만 이번에도 손녀딸...그것도 살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을 못하던
온전치 못하던 손녀딸이 미웠는지
“지 운명이다. ....살 놈은 살테고 죽을 운명은 아무리 저승사자를 막는다 해도 죽는다”
하시며 저를 엄마품에서 떼어내 윗목에 포대기 하나 깔아놓고 그위에 저를 올려 놓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셨다고 합니다.
모진게 사람 목숨이라고....한달 한달 죽을 고비를 넘기며 돌을 맞이 했다고 합니다.
완고한 할아버지께서 그때까기 저를 사람 구실도 못할텐데 무슨 출생신고냐며 출생 신고까지 미루어 왔기에 저희 엄마는 내리 딸 셋을 낳은 죄책감과 온전치 못한 저까지 하루도 마음고생 하지 않은 날이 없었겟지요~
큰 언니 돌사진은 지금 보아도 돈 좀 들여 돌잔치도 하고 돌 사진도 찍고 한 흔적인 고스란히 남아있고
둘째 언니는 남동생을 볼 관상이다 해서 큰 언니 버금가는 돌잔치 흔적이 역역합니다~~^^
하지만 제 돌사진은 마당 한 가운데 등받이 의자에 저를 앉혀 의자 뒤에 숨은 엄마가 양손벌려 포대기를 잡고 그 포대기와 숨긴다고 숨긴 엄마손이 아주 잘 어우러진 환상적인 사진한장이 유일한 제 어릴적 사진이자 돌사진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제 삶.....
출생 신고를 늦게 한탓에 아니 그때까지도 남들보다 발육도 늦고 이해력도 떨어져
저는 8살이 아닌 9살에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입학하고도 자유롭지 못했던 저는 뛰어야 하는 체육시간이 제일 싫었습니다.
그냥 숨이 차고 입술까지 파랗게 변했지만 워낙 몸에 약했으니까 하고 저를 비롯해 가족들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요
그런데 농촌 봉사 활동으로 서울에 있는 의대 학생들이 시골오지에 있는 저희 학교에 봉사를 오면서 제가 정상이 아닌것 같다며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진찰 받을 것을 부모님께 권하셨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서울에 올라간 저는 대학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결과
우심실에서 폐로 가는 혈관이 막혀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술이야 그리 큰 어려움은 없지만 전신 마취를 해야 하는 제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 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답니다.
그렇게 서울에서 큰 짐을 지고 내려온 부모님은 몇날 며칠 울며 고민을 하다
할아버지의 “살놈은 산다 저것은 지금까지 그 몸으로 살아온걸 보면 분명 명이 길것이다”
라는 어색한 위로로 저를 수술대위로 올라가게 했습니다.
의사의 우려대로 마취에서 싶게 깨어나지 않아 또 한번 가족의 애잔장을 녹였던 저였지만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명이 길었는지 수술 후 12시간이나 지나 마취에서 깨어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병원에 입원하고 집에 내려와 보니
평소에 그렇게 갖고 싶었던 누우면 눈이 감기고 일으켜 세우면 눈이 떠져 정말 사람 같은 인형을 할아버지께서 제 손에 쥐어 주시는 겁니다.
그리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 머리를 쓰다듬으시면“어린게 고생했다 ” 하십니다
비록 퇴원은 했지만 수술을 한 제가 10리나 떨어진 학교를 걸어 다녀야 하는 부담감 때문에 할아버지께서 학교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기본적인 한글과 산수는 할아버지께서 직접 가르치겠다며 결석 처리가 안 되게 해달라며 교장선생님께 사정한 결과 저는 몇 달 동안
할아버지께 1학년 공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받아쓰기도 하고 2학년이 되어야 배우는 구구단도 집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다 익혔고
지금 생각하면 전형적인 홈스쿨을 할아버지와 함께 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농삿일로 바쁜 부모님 대신 할아버지와 생활하면서 평소엔 밭일을 하시던 엄마가 점심 식사때가 되면 가족들 점심을 챙겨 나가셨지만 한여름에도 따뜻한 밥을 할아버지께 차려 드리기 위해 먼길 달려 오셨는데 수십년을 이어오던 관행을 깨고 할아버지께서 아침에 엄마가 차려 놓은 점심상을 직접 들고 대청 마루까지 나와 제 밥숟가락 위에 반찬까지 직접 올려 주시면 제가 밥을 다 먹은 당신 수저를 드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 할아버지와의 정은 깊어만 갔고 처음으로 학교서 본 시험에 성적이 좋아
우등상을 타오게 되었습니다.
언니들도 다 같이 상을 탔건만 언니들의 상장엔 관심도 없으신지 제 상장을 큰언니가 처음으로 타와 벽면 액자에 걸려 있는... 집안 가보로 남긴다는 그 상장위로 제 상장을 끼우셨습니다.^^
남동생이 태어났건만 큰언니 작은 언니와는 달리 저를 남동생 처럼 특별 대우를 해 주셨습니다.
장에 나가셨다가 맛잇는 음식이라도 사오시면 저와 남동생 몫은 따로 챙겨 들고 오시고
보약을 먹어야 건강해진다며 먼길 마다 않고 저를 자전거에 태워 한약방 까지 가시곤 했습니다.
어찌나 엄한지 할아버지 말 한마디가 곧 법 인 우리 집에선 다들 할아버지 눈치 보느라 바쁜데 할아버지와 겸상을 한 사람도 바로 저와 남동생일 정도로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지냈지요.
할아버지의 임종....
제 손을 꼭 잡고 “건강하거라” 하고 남긴 한마디
할아버지와의 특별한 정으로 할아버지의 죽음이 그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슬퍼 병이 나도록 울었습니다.
만약 제가 엄마 뱃속에서 열달을 다 채우고 병까지 없었다면 과연 할아버지께서 저를 예뻐 해 주셨을까? 가끔 궁금 할 때도 있답니다~~^^
혈연으로 이어진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전 몇 달간의 저의 스승으로 저를 가르쳐 준 할아버지가 계시기에 인생사는 법과 삶의 지혜를 배웠습니다.
할아버지와의 12년 짧은 만남 이었지만 할아버지의 숨결과 저만이 느낄 수있는 할아버지의 향수는 제가 40이 되는 지금 이 순간까지 간직할 수 있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유언대로 저 지금 너무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가끔은 다이어트 한다고 밥 굶을 때도 있는데.....저 건강하게 잘 지낼 수있도록 할아버지께서 지켜봐 주시고 있기 때문이죠?^^
할아버지 제 마음속에 영원히 훌륭한 스승님으로...또 저를 사랑해주신 할아버지로 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