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MBC

검색
정오의 희망곡 이윤주입니다

정오의 희망곡 이윤주입니다

12시 00분

사연&축하

[만남] 30년 ‘무사고 운전’의 비결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지난 고생담을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과정을 책으로 쓴다손 치면 두어 권으로도 부족하다고 너스레를 떨죠. 그러한 침소봉대(針小棒大)의 사람과 대화 내지 술잔을 나누자면 고개를 주억거리며 동의를 나타냅니다.

 

하지만 속으론 이렇게 다른 마음을 갖지요. ‘당신의 그 고생담은 그렇지만 내게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요!’ 그럼 왜 그런가를 이제부터 가감 없이 이실직고해 보겠습니다. 저는 저의 생후 첫돌도 안 되어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좌절의 늪에 함몰된 홀아버지께선 허구한 날 술에 취해 사셨지요. 그 바람에 국민(초등)학교 시절 줄곧 1~2등의 성적으로 질주했던 성적이었음에도 저는 중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습니다. 술에는 장사가 없는 법인지라 깊은 병까지 드신 아버지와 살자면 제가 소년가장이 되어 무엇을 해서라도 벌어야만 한 때문이죠.

 

고향역 앞에 나가 구두닦이를 시작하는 것으로부터 돈을 벌었습니다. 이어 비가 오는 날엔 우산장사와 맑은 여름날에는 아이스케끼 장사...... 나이가 더 들어선 공사장에 나가 막노동까지 했지요.

 

그렇게 노력을 경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착화된 가난의 벽은 철옹성처럼 견고하기만 했습니다. 그럴 즈음 숙부님께서 새로운 사업을 하신다며 도와달라는 연락이 와서 아산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제 나이 열아홉이었던 지난 1977년이었지요.

 

그 즈음, 지척의 직장에 다니던 지금의 아내가 제 눈에 쏙 들어와 큐피드의 화살로써 제 가슴 깊숙이 와락 꽂혔습니다. 그녀와 눈만 마주쳐도 제 가슴은 흡사 습자지에 물이 번져오듯 그렇게 행복감이 번져왔지요!

 

다행히 그녀는 요즘 유행어인 소위 된장녀가 아닌, 마음씨까지 비단결인 참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우린 서서히 깊은 사랑에 빠져들었고 4년여의 연애 뒤 제가 군복무를 마친 즉시 결혼했지요.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제가 고향인 천안을 떠나 대전으로 이사를 온 지도 올해로 딱 30년입니다. 아들과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은 내로라하는 직장에 다닙니다. 아내와 30년 이상을 살면서도 이혼 따위의 아픔과도 같은 사고가 아닌 무사고 운전을 할 수 있었던 건 어떤 비결이 있었지요.

 

그건 바로 서로에 대한 사랑과 배려 외에도,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지만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는 우리 속담을 또한 철저히 신봉하고 실천한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만남은 열쇠 없는 승용차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50년 이상 이 풍진 세상을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 가장 사랑한 알토란의 대상은 단연 아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