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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선물
저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이 약했습니다. 기관지 천식으로 인해 병원을 마치 우리집 들락거리듯 수시로 드나들었고, 기침을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몸이 아파서인지 밥맛이 없어져서 끼니 때마다 밥을 안 먹겠다고 투정부렸고, 어머니는 그런 저를 간신히 달래어 제 숟가락에 밥을 떠서 직접 제 입에 넣어주며 밥을 먹이셔야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성격이 예민해지고 살이 빠져가는 어린 저를 보며 부모님께서 가장 많이 속을 끓이셨지만, 부모님 못지않게 애태우신 분이 바로 외할머니셨습니다.
어머니를 통해 저의 몸이 약하다는 사실을 들으신 외할머니는 어머니와의 전화 통화에서도 항상 제 걱정만 하셨습니다.
“경진이 병원 갔다 왔냐? 어떻댜?”
“똑같지, 뭐. 당분간 계속 병원 다녀야 된대.”
“어린 게 그렇게 아파서 어쩌냐? 보약이라도 한 첩 먹여봐.”
“아직 어린데 보약은 무슨... 병원에서 약 받아와서 먹이고 있으니까 괜찮아지겠지.”
걱정이 많아진 외할머니는 저의 건강에 대해 얘기하신 날은 잠도 못 주무실 정도로 애를 태우셨다고 합니다.
휴일이나 방학 때 언니, 동생과 함께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는,
“아이구, 내 새끼들 왔네. 할미가 느들 줄라고 과자 사놨어. 얼른 먹어.”하시며 항상 먹을 것부터 챙겨 주셨는데, 특히 저에게 더 많은 양을 갖다 주셨습니다.
“경진이는 이거 다 먹어야 돼. 알았제? 그래야 건강해져서 엄마아빠가 걱정을 안 하제.”
그런 말을 계속 반복해서 들으니, ‘난 말랐으니까 더 많이 먹어야 돼.’라는 생각을 당연시하게 되었고, 외할머니의 보살핌도 마치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특권처럼 받아들이게 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생이던 저는 여름방학을 맞아 외갓집에 놀러갔는데, 밤에 잠을 자다가 저도 모르게 이불에 지도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어머니는 저에게,
“다 커가지고 이불에 오줌을 싸고 있어? 응? 동생도 오줌을 가리는데.. 너는 이게 뭐야? 니가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거 다 젖어서 어떡할 거야?”라며 큰소리로 혼을 내셨습니다. 저는 창피하기도 하고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어머니의 말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하지만, 옆에서 지켜보시던 외할머니는
“됐다. 그만 해라. 야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할 수도 있제. 아마 몸이 약해서 그런갑다. 니가 더 좋은 거 먹이고 신경 좀 써라.”하시며 제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외할머니의 중재로 그 날의 상황은 가까스로 종료되었지만, 집으로 돌아온 뒤에 저는 한동안 오줌싸개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언니와 동생의 놀림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집으로 영문을 모르는 소포 하나가 도착했습니다. 발신인에 외할머니의 성함이 적혀 있는 걸 보고 엄마가 급히 외갓집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엄마, 웬 소포야?”
“응, 그거 녹용이랑 몇 가지 약재 해서 보약 지은 거니께, 경진이 좀 먹여라.”
“경진이?”
“그래, 지난 번에 보니께 애가 몸이 약해서 못 쓰겄더라. 그러게 진작 보약 좀 해 먹이래니깐.”
그 소포는 바로 손녀딸의 건강이 염려되신 외할머니가 그 동안 농사일을 하시며 한 푼 두 푼 모으신 돈으로 마련한 저의 보약이었습니다. 저는 그 날부터 어머니가 매일 하나씩 건네주는 보약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보약이 몸에 좋고 비싼 약이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저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얌전하게 다 받아 먹었습니다.
그 보약의 힘 덕분인지 이후로 저는 무럭무럭 자라 성인이 된 후에는 감기도 잘 안 걸리는 건강한 체질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이렇게 건강하게 될 때까지 마음을 다해 보살펴주신 외할머니는 2년 전 뇌출혈로 갑자기 쓰러지신 뒤 현재 충남의 한 요양병원에서 간병인과 함께 24시간을 생활하고 계십니다. 온 몸이 굳어져서 간병인의 도움 없이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시는 외할머니. 궂은 농사일을 하시느라 억척스럽고 누구보다도 정정하신 분이었는데, 이제는 하루 종일 병원 침대 위에 야윈 몸으로 누워 계셔야 하는 외할머니를 생각하면 제 눈에는 어느 새 눈물이 고입니다. 외할머니가 그렇게도 걱정하셨던 손녀딸이 이제는 건강해져서 한 남자와 결혼을 하고 올해 사랑스러운 딸까지 낳았는데, 외할머니는 외손녀의 결혼식, 신혼집, 증손녀의 재롱 그 어느 것 하나 지켜보지 못하신 채 그렇게 병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외할머니가 20여 년 전 저에게 주신 선물은 단지 보약만이 아니었습니다. 외손녀 걱정에 잠 한 숨 이룰 수 없었던, 외손녀를 끔찍이도 사랑하셨던 외할머니의 크고 따뜻한 마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지금도 정신이 오락가락하셔서 가족도 잘 못 알아보실 때가 많은데, 제가 가끔 외할머니를 뵈러 가면, 제 얼굴을 보시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십니다. 그런 외할머니께 저는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어, 마음만 새카맣게 타들어갑니다. 외할머니의 따스한 사랑에 손녀딸이 이제라도 조금이나마 보답할 수 있도록 외할머니가 기적처럼 일어나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할머니, 마음속 깊이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