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벤트게시판

<30> 대전에 정착한지 30년이 되었네요.

  30이라는 숫자가 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고민하던중 30년 전이 떠올라 이렇게 사연을 쓰게 되었어요.

  30년전인 1983년 저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어요. 옥천에서 할머니, 큰집, 작은집, 고모, 삼촌들이 한집에서 생활하는 전형적인 대가족 생활을 했었죠. 마당도 무척 넓어서 감나무, 사과나무, 자두나무 등 온갖 나무와 모든 채소들을 길러 먹을 정도였어요. 그러던 중 그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서 모든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어요.
 
대전 엠비씨 라디오가 개국하던 해에 부모님과 저 그리고 동생은 대화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슬레이트 지붕의 방 세개에 다른 세가족이 각각 생활하고 저희 방 옆엔 공용화장실이 있는 집이었어요. 1년 사글세가 30만원이었는데, 그 돈이 없어서 외삼촌께 빌려 대전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 집도 아이가 둘이 아닌 한명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간신히 얻은 집이었어요. 이사 온 후 주인 할머니께 한동안 아이가 둘이라는 이유로 잔소리를 들어야 했고 어린나이에 주인 할머니의 눈치를 봐야했었죠.

 아버지 나이 39살에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환경이었어요. 아마 그 당시 부모님께서 그런 환경을 절망하셨다면 지금의 저희는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부모님께서는 절망하지 않고 아버진 회사를 다니시고 어머니는 집에서 부업으로 차곡차곡 저축을 하셨어요. 저와 동생도 어머니 부업하는 것을 도와드리며 하루 20원을 받아서 뽀빠이를 사먹곤 했어요. 그 당시 깐돌이라는 아이스크림이 50원, 별사탕이 있는 뽀빠이는 50원, 그냥 뽀빠이는 20원 이었어요. 그래도 그 뽀빠이가 어찌나 맛있던지.....
  

  초등학교 3학년때부터 어머니는 2천원을 용돈으로 주시고 반은 (지금은 없어진) 충청은행에 저축을 시키고 천원으로 한달을 생활하도록 교육을 시키셨어요. 명절이나 아버지 친구분들께서 주시는 돈은 무조건 은행에 저축하도록 시키셔서 저와 동생이 결혼하기전 내집 마련을 할 수 있는 종자돈이 되었어요. 어린나이에 용돈으로 한달을 계획적으로 생활한다는 것은 쉽지않은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습관이 저희에게 그 어떤 것보다 큰 재산이 되었어요.

  부모님의 노력으로 대전으로 이사온지 8년만에 저희 가족은 내집 장만을 하게 되었고, 대전에 정착한지 30년이 지난 지금, 부모님, 저희 가족 4명, 동생 가족 4명 이렇게 10명으로 늘어났어요. 부모님, 저와 동생네 가족 뿐 아니라 제 처갓집과 동생 처갓집도 모두 대전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30이라는 숫자는 제 가족에게 절망에서 희망, 불행에서 행복을 선사해준 숫자랍니다. 아! 그리고 저와 큰아들, 아내와 작은 딸의 나이 차이도 서른살이네요. 그러고보니 30이란 숫자는 저에게 아주 큰 인연이 있네요.

대전엠비씨 라디오 개국 30주년 축하드리고 앞으로의 30년도 모두 행복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