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사연
고향 유정
고향에도 그해 여름은 변함없이 찾아왔다. 마치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 왔네’ 식의 동네 어르신들 푸념처럼 그렇게.
지금은 큰 아파트가 점령하고 있는 충남 천안시 와촌동 그곳엔 충남굴지의 방직공장이 우뚝이 자존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한데 그 공장이 당시로선 우리 동네 사람들에게도 천군만마의 먹을거리를 제공해주는 생계유지의 화수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공장에 다니는 이들은 그 공장의 작업복을 입은 것 하나만으로도 금세 주변사람들에게 직업적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여 남자들은 근처의 선술집에서 외상술을 푸짐하게 마실 수 있었고, 누나들 또한 치부책에 기록하곤 화장품을 얼마든지 외상으로 사들여 얼굴에 고루 펴 바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공장은 아무나 다 고용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에 내가 살았던 고향 충남 천안의 와촌동은 못 사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더 많은 전형적 슬럼가였던 것이다.
실한 물둠벙보다는 논틀밭틀이 더 많은 동네의 누항엔 개를 기르는 집이 있었다. 그런데 송아지만한 개를 키우면서도 개의 목에 걸린 줄을 길게 늘어뜨린 때문에 그 집의 개들은 길 전체를 얼추 점유하는 텃세까지를 맘껏 향유했다.
따라서 어른들도 기피하는 그 길을 가기엔 우리 같은 꼬마들은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대신에 개울을 건너 다른 길을 이용하곤 했는데 그래서 지금도 초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그 시절 얘기를 꽃피우자면 반드시 그 장면이 덩달아 회상되곤 하는 것이다.
나는 여름이라고 하여도 여전히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 하지만 당시에 그 개를 키우던 집은 무시로 개가 바뀌곤 한 걸로 보아 아마도 단골 군치리집에 개를 팔았지 싶다. 요 며칠 몸이 안 좋아 고군분투하고 있다.
견디다 못 하여 야근인지라 오전엔 짬이 나는 오늘은 잠시 전 병원에까지 다녀왔다. 의사는 과로가 겹쳤으니 푹 쉬시란다. ‘그럼 오죽이나 좋겠어요?’
그도 그럴 것이 하루는 주간, 이튿날은 야근의 연속인데 이에 더하여 전국 규모의 퀴즈 프로그램 출연이 확정돼 있는 까닭에 연일 파김치가 되도록 공부하는 중이다. 하여간 병원을 다녀오는데 고향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낼모레 퀴즈 프로그램 녹화 간다면서?” “응, 근데 어떻게 알았니?” “벌써 친구들 사이에 소문이 다 났더라. 암튼 이번엔 반드시 1등하고 내려와. 그리고 퀴즈도 좋지만 건강도 챙겨가며 하고.”
고향친구의 이 부족한 친구 살핌이 다시금 고마웠다. 오늘 점심엔 보양식으로 추어탕이라도 한 그릇 할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