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오의 희망곡

정오의 희망곡

12시 00분

사연&축하

라디오가 사람 울리네!

 

어제도 날씨는 여전히 추웠다. 동동거리며 퇴근하자니 배까지 덩달아 ‘추워’ 견딜 재간이 없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주변에 있는 떡볶이와 어묵을 파는 노점으로 들어섰다. 거기서 뜨거운 국물에 어묵 두 개를 먹으니 좀 나아지는 듯 했다. 귀가하여 몸을 씻은 뒤 주방으로 들어섰다. 예의 습관처럼 식탁에 있는 라디오를 켜고 아침에 먹다 남은 국을 덥히고 거기에 밥을 말았다.

 

라디오에선 마침, 아니 공교롭게도 인기 프로그램인 <지금은 라디오 시대>의 ‘부치지 못 한 편지’라는 코너가 방송되고 있었다. 나이가 21세라는 여대생이 전화로 출연했다. 그리곤 자신이 어려서 이혼한 엄마를 찾자 아빠가 “네 나이 스물이 되면 만나게 해 주겠다.”고 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지금껏 아빠는 함흥차사인 까닭에 진행자인 “두 분이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진행자들은 여대생의 편지를 읽은 뒤 이번엔 여대생의 아빠와 전화를 연결했다.

 

그 아빠는 미안하다면서... 그리고 자신의 전처(前妻)소식을 모른다며 울먹였다. 이에 그 딸 또한 눈물바다를 이뤘다. 밥을 먹던 나 또한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아니 그보다 더 발전하여 급기야는 목울대까지 울컥 울리면서 먹던 밥을 토하기에 이르렀다. 어제 출연한 부녀(父女)에겐 아이들이 어려서 이혼한 뒤 재혼한 ‘아내’와 ‘엄마’가 존재한다고 했다. 친엄마 이상으로 잘 해 준다곤 했지만 자신을 낳아준 생모를 그리워하고 아울러 언제나 보고픈 건 자식의 한계이자 본능이며 이는 또한 자연스런 현상이다.

 

언제부턴가 이혼이 별 흉이 안 되는 사회로 접어들었다. 심지어 어떤 여배우는 이혼을 마치 밥 먹듯 한 이도 실재한다. 그러나 이같이 변혁된 결혼관, 예컨대 살다가 맘에 안 들면 이혼을 여반장으로 하는 세태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애초 생면부지의 남녀가 만나 사랑을 꽃피우고 더 나아가 부부의 연을 맺어 가정이란 둥지를 꾸린 건 모두가 ‘신뢰’라는 출발점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로 이혼이란 막바지까지 도달하게 된(되는) 현상은 결국엔 신뢰가 죄 부서졌다는 극명의 반증이다.

 

남의 집안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다. 다만 부언코자 하는 건 아무리 헐벗고 추우며 어려운 삶일지라도 부부가 변치 않고 살아만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식(들)은 충분히 힘을 얻고 의지하며 불변의 신뢰감까지를 느낀다는 사실이다. 방송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먹먹한 마음을 제어하느라 힘들었던 어제였다.